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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일시적인 해방감을 주는 수단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사람의 감정을 대신 표현해 주고, 마음의 빈틈을 메워주는 역할까지도 한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은 그런 알코올과의 복잡한 관계를 탁월하게 포착한 책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캐롤라인 냅은 20년에 걸친 자신의 알코올 중독 경험을 숨김없이 고백하며, 음주라는 행위가 단순한 습관이나 도피가 아닌 ‘감정의 언어’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한 여성의 자전적 에세이임과 동시에, 현대 사회 속 개인의 외로움, 자기 억압, 감정 결핍이 어떻게 중독으로 전이되는지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인문서에 가깝다.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가야 했던 가정환경, 성공을 강요받는 사회적 배경, 여성에게 부과된 이상적 이미지 속에서 자기를 잃어가던 캐롤라인 냅은 점차 알코올에 감정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독자들은 그녀의 솔직하고 정제된 문장을 통해, 중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감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공감하게 된다. 『드링킹』은 결국 음주라는 문제를 넘어, 인간 내면의 결핍과 고독,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중독 심리의 본질
알코올 중독은 흔히 '의지력 부족'으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드링킹』의 저자 캐롤라인 냅은 이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녀는 중독이란 단순한 습관의 반복이나 성격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은 심리적 구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실제로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엘리트 저널리스트였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내면은 정서적 결핍과 자기부정, 억눌린 감정들로 뒤엉켜 있었다. 알코올은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자, 감정적 생존 전략이었다.
그녀는 술을 단순한 음료가 아닌 ‘관계의 대상’으로 묘사한다. “술은 나를 안아주는 존재였고, 내 안의 두려움을 잠재우는 마법 같은 수단이었다.” 이 고백은 단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중독을 특정 대상에 대한 정서적 애착의 전이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캐롤라인 냅에게 술은 외로움과 불안을 잊게 해주는 보호막이자, 긴장과 두려움을 완화해 주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안정감과 수용의 감정을, 그녀는 알코올에서 찾았던 것이다.
심리학자 가보 마테(Gabor Maté)는 중독을 “상처받은 자아가 일시적으로나마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낸 해법”이라 설명한 바 있다. 겉보기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생처럼 보였지만, 캐롤라인 냅의 내면에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외면된 감정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부모로부터 충분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했고, 감정 표현이 억제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으며, 여성으로서 감정을 자유롭게 드러내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 역시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녀는 점점 술에 의지하게 되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술에 깊이 빠져들수록 오히려 일에서는 더 뛰어난 성과를 냈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독자일지라도 겉으로는 매우 정상적이고 기능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 이면에서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캐롤라인 냅은 ‘고기능 중독자(high-functioning addict)’의 전형적인 사례였고, 이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주 문제를 가볍게 여기거나 중독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캐롤라인 냅의 이야기는 중독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던진다. 중독은 결코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억눌려온 감정, 외면된 고통, 그리고 자기부정이 축적된 결과일 수 있다. 그녀의 경험은 중독을 단순한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 조절 능력과 자기 인식의 결핍에서 비롯된 복합적인 심리 현상으로 바라봐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중독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난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결핍과 상처,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감정 결핍이 부른 음주의 길
캐롤라인 냅의 어린 시절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미국 보스턴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존경받는 정신과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예술적인 감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학문과 예술이 공존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그녀의 가정은 주변에서 ‘이상적인 가정’으로 여겨졌고, 그녀 역시 안정되고 반듯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란 캐롤라인은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없이 성장했으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조용하고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억누르며 살아가야 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졌고, 애정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겉으로는 완벽한 딸, 훌륭한 학생이었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 사랑받기 위해선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일종의 감정적 거래 구조 속에서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고 스스로를 검열했다. 이런 억압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고요함이 아닌, 해소되지 않은 불안과 결핍으로 축적되었고, 결국 그녀는 그 틈을 술로 채우기 시작했다.
초기의 음주는 단순한 일탈이었다. 대학 시절 파티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마셨던 한두 잔의 술은, 당시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술이 그녀에게 주는 따뜻함과 느슨함, 감정을 잠시나마 허용해 주는 듯한 그 ‘느낌’은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술은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의 화끈함과 동시에 마음속 어딘가에 쌓인 얼음을 녹여주는 듯한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술은 그녀에게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유일하게 감정을 허용해 주는 도구이자 존재가 되었다.
감정 결핍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술 없이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졌고, 자신을 표현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그녀는 강한 긴장감과 두려움을 느꼈고, 술 없이는 감정적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술을 통해서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고, 심지어는 성적인 관계조차 알코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고백한다. 술은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고,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일시적으로나마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환상을 제공해 주었다.
이처럼 감정의 부재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대인관계에서의 불안과 회피로 이어졌다. 그녀는 술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 술은 잠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지만, 근본적인 상처를 치유하지는 못했고 결국 중독이라는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었다.
『드링킹』 속 캐롤라인 냅의 이야기는, 감정 결핍이 얼마나 강력한 방식으로 인간의 선택을 왜곡하고, 삶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감정을 억누르는 문화, ‘괜찮은 척’ 하는 삶, 그리고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개인은 스스로도 모르게 중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그녀의 고백은 단지 알코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정서적 연결’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만든다.
중독에서 회복까지의 여정
중독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삶 전체에 은밀하게 스며들어, 일상의 일부가 된다는 데 있다. 캐롤라인 냅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그녀는 하루도 술 없이는 살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의 외적인 삶은 누구보다 화려했다. 유수의 매체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날카로운 통찰과 문학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중독은 그녀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녀가 ‘성공한 여성’이라고 믿었다. 이처럼 많은 중독자들은 겉으로 멀쩡해 보인다. 바로 ‘고기능 중독자(High-functioning addict)’의 전형이다.
그녀는 일에서의 성공을 자신에게 술을 허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원고를 마감하고, 인터뷰를 끝내고, 칭찬을 들을 때마다 “나는 충분히 해냈어. 마실 자격이 있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렇게 술은 보상 수단이 되었고, 위로이자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술은 그녀의 의지를 압도했다.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었고,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녀는 “필름이 끊기는 순간이 점점 빨라졌다”라고 회상한다. 그것은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중독에서의 회복은 단순한 결심이나 ‘끊어야지’라는 다짐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캐롤라인 냅이 묘사하는 회복의 과정은 극도로 감정적이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비참한 단계들을 동반한다. 술이라는 오랜 친구이자 연인과 작별한다는 건,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떼어내는 일과 같다. 그녀는 알코올과의 관계를 “사랑과의 이별”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린다는 감정과도 연결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깊은 상실감과 공허함,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캐롤라인은 자신을 조금씩 다시 찾아가기 시작했다. 술 없이 사람을 만나는 법,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법,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은 ‘다시 태어나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회복의 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알코올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건강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드링킹』을 집필하게 된다.
『드링킹』은 단순한 알코올 중독 체험담이 아니다. 이 책은 중독이라는 주제를 문학적 언어로 승화시킨 회복의 서사이자, 정체성과 감정, 인간 본성에 대한 치열한 성찰의 결과물이다. 특히 여성이라는 존재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온전함’과 ‘절제’를 내면화한 채 살아가며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캐롤라인 냅은 자신의 약함과 실패를 용기 있게 드러냄으로써, 동일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치유의 가능성을 전달한다.
중독에서 회복된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변해버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술을 사랑하지 않지만, 내가 술에 빠졌던 나를 이해한다”라고. 이 문장은 회복이 단순히 ‘끊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과거를 수용하고, 연민을 갖고 바라보는 과정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결론 - 상처를 직면하고 회복을 선택하는 용기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은 단순한 음주 고백서가 아니다. 이 책은 인간이 자신의 약함을 어떻게 마주하고, 그 약함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지를 진솔하게 보여준다. 캐롤라인 냅은 술에 의지하며 살아온 20년을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결핍과 불안, 외로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이 책은 알코올 중독이라는 주제를 넘어서,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깊은 메시지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상처들, 외면했던 감정들, 혼자만의 공허함은 때로 중독이라는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회복은 가능하다. 그 시작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데서 출발한다.
캐롤라인 냅은 결국 술과 작별했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해방이었다. 그녀는 중독을 치유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며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나눴고, 그 자체로 또 다른 이들에게 희망이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회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돌보는 것에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진정한 회복은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그 너머를 선택하려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무엇을 통해 위로받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