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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오키나와 노트』는 일본 현대문학사에서 전쟁이라는 주제를 가장 깊이 있게 다룬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발표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고 있다. 오키나와라는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오에가 바라본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국가의 책임, 그리고 집단 기억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들이었다.
이 책에서 오에는 전쟁의 참혹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것이 한 사회와 구성원들의 의식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를 치열하게 추적한다. 특히 그는 오키나와 전투 중 발생한 민간인의 집단 자결 사건을 통해, 국가권력이 어떻게 개인을 억압하고, 전쟁이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는지를 직시했다. 그의 문장은 때로는 냉정할 만큼 차갑지만, 그 안에는 깊은 연민과 고통에 대한 이해가 깃들어 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 속에서, 『오키나와 노트』는 과거의 기록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질문이 된다.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안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디로 사라지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또 어떤 방식으로 되풀이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오키나와 노트』를 통해 우리가 전쟁과 평화, 그리고 기억에 대해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단지 문학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시대를 꿰뚫는 통찰을 담은 한 지식인의 기록으로서 이 작품을 다시 읽어보며, 오늘날 우리의 전쟁 인식은 어디쯤 와 있는지를 함께 성찰해 보고자 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세계와 『오키나와 노트』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문학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94년,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전 세계에 일본 문학의 깊이와 철학을 다시 한번 알렸고, 그 중심에는 항상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이라는 주제가 있었다. 그는 한 사회가 직면한 윤리적 질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고민을 문장으로 옮겨온 사상가이자 지성인이었다.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오키나와 노트』는 단연 독특한 위치에 있다. 1970년에 발표된 이 책은 르포르타주 형식을 띠고 있으며, 일본 본토와는 다른 역사적 경험을 지닌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전쟁의 현실을 조명한다. 특히 이 책은 오키나와 전투 중 수많은 민간인이 집단으로 자결하게 된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일본 정부와 군의 책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침묵과 왜곡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오에는 이 책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일본 국가권력의 책임을 묻는다. 그는 오키나와를 단순한 ‘전쟁 피해 지역’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오키나와를 내부의 식민지처럼 취급해 온 역사에 주목하며, 그로 인해 발생한 구조적 불의와 차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군사적 명령과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민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단순한 전쟁 피해를 넘어서는, 보다 구조적이고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한다. 이는 곧, 한 국가가 자국민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서술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특히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과 언론은 오에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고, 일부는 명예훼손 소송까지 제기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진실을 기록하고, 역사 속에서 침묵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책임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노트』는 발표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강한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전쟁의 상처는 단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그 기억을 어떻게 다루고,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가 곧 현재와 미래의 가치 판단에 깊이 관여한다. 오에는 문학을 통해 그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역사학자가 아니면서도 그는 사실을 기록했고, 정치인이 아니면서도 국가의 책임을 물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의 문학은 개인의 사유를 넘어서, 사회적 양심의 역할을 해왔다.
『오키나와 노트』를 통해 우리는 오키나와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비극만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권력에 대한 경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성찰, 그리고 침묵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이 책은 전쟁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사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문학이야말로 시대를 뛰어넘는 힘을 가진다.
오키나와의 역사와 집단 자결 사건
『오키나와 노트』에서 가장 중심적인 사건은 바로 오키나와 전투 중 벌어진 ‘집단 자결’이다. 단어만 들어도 숨이 턱 막힌다. 가족이 가족의 손에, 주민이 서로의 손에 죽음을 택해야 했던 상황. 우리는 이것을 그저 '전쟁의 비극'으로 단순하게 표현해 버릴 수 있을까?
1945년,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하던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했고, 그 결과 이 섬은 전쟁의 최전선이 되었다. 일본 정부와 군은 이 지역을 전략적 방패막이로 삼았고, 오키나와 주민들은 그 사이에서 철저히 고립되었다. 이들에게 닥친 것은 전투만이 아니었다. ‘죽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더 나아가 국가가 의도적으로 주입한 집단의식이 그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오에는 『오키나와 노트』에서, 당시 군이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강요하거나 최소한 묵인했다고 주장한다. “적의 손에 잡히느니 죽어라”는 말이 너무 쉽게 통용되던 그 시대의 광기를, 그는 작가로서 차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기록했다. 이는 일본군의 작전 실패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며,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한 사회 전체가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쉽게, 그리고 가볍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그 죽음들이 ‘의로운 선택’이나 ‘충성된 행동’으로 포장되었다는 점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침묵을 강요당했고, 때로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남은 삶을 살아야 했다. 그 고통은 총성보다도 더 오래, 깊게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오키나와 노트』는 바로 그 목소리를 찾아내려는 시도였다. 숨겨진 진실,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 기록되지 않은 상처들을 오에는 문장으로 끌어올렸다.
이 책이 발표된 이후, 일본 사회 안팎에서는 이 ‘집단 자결’ 사건에 대한 재조명과 논란이 이어졌다.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 공식 기록, 그리고 정부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법적 공방까지—『오키나와 노트』는 단순히 문학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 논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기억하려는 자’로서의 오에가 있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되새겨야 하는 이유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체제의 논리로, 공동체라는 명분 아래에서 개인이 소외되고, 인간의 존엄이 희생되는 일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키나와 노트』를 통해 오에는 묻는다. "당신은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그 물음은 우리에게서 고개를 돌릴 틈도 주지 않은 채, 조용하지만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이 지금도 읽혀야 하는 이유다.
평화 담론 속에서 다시 읽는 『오키나와 노트』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뉴스 화면에는 포화가 쏟아지고, 피난민들이 발 디딜 곳 없는 현실을 살아간다. 전쟁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운 오늘, 50년 넘게 세월을 견뎌온 『오키나와 노트』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의 상처를 통해 지금을 이해하려는 아주 절실한 노력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오키나와 노트』를 통해 전쟁이 남긴 물리적 피해보다 더 깊은, 정신적·도덕적 폐허에 주목했다. 그는 전쟁이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국가라는 이름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아주 차분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드러낸다. 단순한 분노나 슬픔을 넘어서, 오에는 “우리는 왜 이런 역사를 반복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우리가 ‘평화’를 말할 때, 그 단어는 너무 쉽게 쓰이곤 한다. 그러나 『오키나와 노트』를 읽으면, 평화란 단순히 총성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고, 왜곡된 진실을 드러내며,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 오에는 바로 그 역할을 문학이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오키나와 노트』는 문학이 사회를 흔들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시리아, 미얀마 등 여러 지역에서 인간의 생명이 너무 쉽게 희생되고, 전쟁이 또 다른 전쟁을 낳는 악순환을 목도하고 있다. 이럴 때 『오키나와 노트』는 마치 지금 쓰인 책처럼 우리에게 말을 건다. ‘당신은 이 고통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외면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질문은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의 힘은 바로 그런 어려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데 있다. 오에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독자가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의 글은 읽는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 마치 한 번 새겨지면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말이다.
『오키나와 노트』는 지금 읽어야 할 책이다. 전쟁이 다시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단지 과거의 반성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가 남긴 이 기록은, 문학이 어떻게 역사를 붙들고, 평화를 향한 길을 밝혀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나침반이 되어준다.
결론: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을 성찰하다
『오키나와 노트』는 한 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이,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국가, 그리고 그 속에서 소외되고 억눌렸던 사람들을 향해 던진 절박한 질문이자 응답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 책을 통해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는 말로 쉽게 포장되는 ‘평화’가 아닌,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함으로써 시작되는 진짜 평화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오키나와 노트』를 지금 읽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 속에는 단지 과거의 비극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과 닮아 있는 수많은 모습들이 있기 때문이다. 침묵을 강요받던 사람들, 국가에 의해 희생된 존재들, 그리고 그 상처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으려는 한 작가의 용기. 그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평화의 본질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잊지 않는 것, 듣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문학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오키나와 노트』를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상처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고, 우리 안의 침묵을 깨우는 과정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글로 저항했고, 침묵하지 않음으로써 함께하려 했다. 그의 문장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묻는다 — 이제 당신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그래서 이 책은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