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필연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이 문장은 줄리언 반스의 소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Elizabeth Finch )를 관통하는 하나의 철학적 명제이자,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이다. 우연처럼 시작된 만남, 우연히 스치듯 주고받은 한마디, 우연처럼 주어진 기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삶의 궤도 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필연적 사건이었다고 믿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줄리언 반스는 한 남자가 경험한 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삶과 역사, 기억과 해석의 본질을 천착한다. 한편으로는 아주 개인적인 서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이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서사를, 반스는 특유의 정확한 문장과 날카로운 시선, 그리고 유려한 리듬으로 짜내며 펼쳐낸다.
역사는 누가 쓰는가?
기억은 얼마나 진실한가?
우연이라는 이름의 사건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이 세 가지 물음을 중심에 두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살아가는 진실이라는 개념을 조금씩 해체하고 다시 쌓아 올린다.
기억과 진실 사이, 엘리자베스 핀치와 닐의 관계
주인공 닐은 인생의 어느 경로에서든 실패했다고 느끼던 순간, 우연처럼 한 강좌를 듣게 된다. 그 강의실에서 그는 엘리자베스 핀치를 만난다. 삶의 결핍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던 닐에게, 핀치는 단순한 교수 이상이었다. 그녀는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사람, 그러니까 ‘어른’이었다.
핀치는 수업 첫 시간에 분명히 말했다. “나는 여러분의 머릿속에 사료를 밀어 넣는 강사는 아닙니다.” 닐은 그 말에서부터 그녀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녀는 늘 학생들을 존중했고, 그들의 의견에 진지하게 반응했다. 학생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사소한 생각도 가치 있게 바꾸어주는 능력을 지녔다.
닐은 그녀에게 단번에 끌렸다. 자신보다 훨씬 똑똑하고, 더 명료하게 세계를 보는 사람. 닐은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진짜 삶의 자리로 들어섰다는 감정을 느낀다.
강의가 끝난 이후에도 이 특별한 관계는 이어진다. 무려 20년 동안,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점심을 함께한다. 정해진 75분 동안의 대화는 철학과 역사, 문학, 종교, 삶의 태도에 대한 깊은 토론으로 채워진다. 이 점심시간은 닐에게 정신적 성찰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된다.
세속과 거리두기한 인물, 고고하면서도 단호한 그녀와의 대화는 단순한 사교를 넘어 닐의 내면을 조율하는 나침반과도 같았다. 이 관계는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초월한다. 닐은 핀치를 존경했고, 또 은근히 흠모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단순한 연모를 넘어, 삶을 다시 구성하려는 욕망과도 관련된다.
핀치는 닐의 사유를 변화시켰고, 그의 세계관을 전복시켰다. 그녀를 통해 닐은 세계를 더 정교하게, 더 풍부하게 바라보게 되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다시 정의하기 시작한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 의미심장한 제목의 메시지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독자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우연이란 정말 존재하는가?" "혹시 우리가 우연이라 여기는 순간들이, 알고 보면 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필연은 아닐까?"
소설은 핀치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닐이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며 시작된다. 책상 서랍 속에 남겨진 필기 노트, 손으로 정리된 문장들, 미완성 에세이 한 편. 이것들은 단순한 잔재가 아니다. 닐에게 그것은 마치 핀치가 남긴 마지막 과제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도는 여기서 출발한다. 이 여정을 통해 닐은 깨닫는다. 핀치를 만난 것도, 그녀의 수업을 들은 것도, 점심을 함께 한 그 수많은 시간들조차, 우연이 아니었으며, 삶이 닐을 그녀에게로 인도한 필연이었다는 것을.
삶의 큰 사건들은 흔히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사소해 보이는 작은 선택들—그 강좌를 등록한 일,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한 첫날의 용기—이야말로 인생의 궤적을 바꾼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혹시 당신의 인생에서도, 지금 이 순간이 우연이 아닌 필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가?"
이처럼 제목은 단순한 상징이나 문학적 장치가 아니다.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인식의 키워드이며, 삶에 대한 해석의 틀이다. 줄리언 반스는 이 소설을 통해 우연이라는 말의 이면을 탐색하고,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낸 순간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단일 서사에 대한 경계와 해석의 다층성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가 돋보이는 이유는 단지 감정의 깊이나 서사의 탄탄함 때문이 아니다. 이 소설의 진짜 힘은, 독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는 정말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기억할 수 있는가?”
“기억이라는 것은 진실을 담고 있는가, 아니면 진실을 가리는 또 다른 형태의 서사인가?”
줄리언 반스는 이 소설에서 '기억'과 '해석'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거울을 마주 세워 놓는다. 독자는 이 사이에서 끊임없이 반사되는 이미지처럼 흔들리는 진실을 목격하게 된다. 주인공 닐이 엘리자베스 핀치를 기억하고 회고하는 방식은 처음엔 감동적이면서도 절절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독자는 닐의 회고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필터링된 이야기인지를 깨닫게 된다.
닐은 핀치의 유품들—노트, 메모, 미완성 글들—을 통해 그녀의 사상과 세계를 되짚어보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거 함께 수업을 들었던 다른 학생들의 기억과 증언도 수집한다. 그런데 이 기억들이, 놀랍게도 서로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는 핀치를 차가운 인물로 기억하고, 어떤 이는 그녀를 놀랍도록 인간적인 존재로 회상한다.
닐은 당황한다. 왜냐하면 그가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 핀치는 너무나도 명확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단단하고, 논리적이며, 따뜻한 이성과 냉철한 통찰을 가진 사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기억은 그 그림을 불안정하게 흔들어댄다.
이것이 바로 반스가 말하는 기억의 본질이다. 기억은 절대적이지 않다. 기억은 선택적이고 조작적이며, 어쩌면 가장 정교한 창작 행위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진실을 떠올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진실만을 반복해서 각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엘리자베스 핀치는 닐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끊임없이 변형되고, 편집되고, 재구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단순한 인간의 기억을 다루는 소설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이름의 서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그것이 진실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철학적 소설이 된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반스는 말한다. 한 사람은 하나의 서사로 결코 묶일 수 없다고. 그리고 그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여정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일신주의"와 인물 구축의 역설
작품 속 엘리자베스 핀치는 '일신주의(一信主義)'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언제나 하나의 절대적 진실이나 가치에 매달리는 것을 경계했다. 역사는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공존할 때 그 존재 의미를 가지며, 사람의 삶 역시 하나의 고정된 프레임으로는 절대 설명될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제자였던 닐은 그녀를 하나의 일관된 인물로 기억하려 애쓴다. 핀치는 따뜻했고, 지혜로웠고, 이성적이었으며, 냉정하지 않았다고 그는 믿는다. 그런 그녀를 회고하며 닐은 무의식 중에 일종의 인물 '구축'을 해나간다. 마치 전기 작가처럼 그녀의 삶을 정리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발생하는 가장 묘한 긴장감이자, 역설적인 지점이다. 그녀가 가장 경계했던 방식으로 그녀를 기억하는 것. 그녀가 가장 싫어했던 방식으로 그녀를 '정리'하는 것.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모순이 아니라, 기억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 역설은 문학의 작용 방식 자체에 대한 메타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소설이란 결국 인물과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라는 작품 자체도 핀치를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구축하는 또 다른 ‘일신주의’일 수 있지 않은가?
줄리언 반스는 이 딜레마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이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왜 자꾸만 타인을 한 줄 요약으로 정의하려 하는가?" "왜 복잡한 인간을 단순한 서사로 압축하고 싶어 하는가?" "그것이 과연 이해인가, 아니면 편의인가?"
역사는 언제나 해석될 수밖에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고 회고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숭고하지만, 결코 객관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기억하려' 한다. 그것이 인간이 세상을 견디는 방식이며, 동시에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적 층위를 담고 있기에,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단순한 인간 서사가 아니라, 기억의 진정성과 해석의 윤리성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역사와 철학의 경계,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분명히 소설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플롯 중심의 소설과는 다르다. 줄리언 반스는 이 작품에서 픽션이라는 외형을 취하지만, 그 안에 논픽션의 골격과 철학적 탐색의 내장을 숨겨 놓는다. 읽는 내내 독자는 어디까지가 이야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사상인가를 경계 짓기 어려워진다. 그 불분명함이 바로 이 책의 독창성과 지적 밀도를 높이는 결정적 요소다.
반스는 역사라는 재료를 소설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율리아누스라는 실존 인물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이 작품을 구성하는 ‘사유의 거푸집’이다. 그를 통해 반스는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시선으로 덧칠된 해석의 산물인가?”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율리아누스 개인의 행적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상징이다. 신념과 체제, 종교와 권력 사이에서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던 존재. 하지만 그의 결정은 시대가 지나면서 배신자라는 낙인으로 정리되었다. 이 지점에서 반스는 ‘역사란 과연 누가 쓰는가’라는 문학의 고전적인 질문을 새삼스럽게 꺼내 든다.
이처럼 이 책은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나열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건의 서술이 아니라 그 해석의 층위를 탐색한다. 율리아누스의 생애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볼테르 등 고전 철학자들의 이름을 등장시킴으로써 소설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넓히고, 그 속에서 지적인 대화를 가능케 하는 철학적 공간을 구축한다.
줄리언 반스는 이 지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작가다. 그는 독자에게 단순한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데 집중한다. 철학, 역사, 신념,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들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며, 그것이 표면으로 드러날 때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하게 만들고, 때로는 멈춰 서서 한 문장을 곱씹게 만든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그의 문체다. 줄리언 반스의 문장은 ‘아름답다’는 평가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문장은 오히려 단단하고 투명하다. 군더더기를 철저히 배제한 채, 핵심만을 남겨두는 방식. 그러면서도 한 문장 안에 다층적인 의미를 압축시켜, 독자가 한 문단 안에서 두세 겹의 철학적 독서를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런 문체는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작가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반스는 독자가 표면에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문장을 통해 사고를 자극하고, 사유를 유도하며, 감정을 뒤흔든다. 바로 이 점에서 줄리언 반스는 철학적 소설가이자,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사유하는 지식인이다.
우연이라는 필연을 받아들이는 존재론적 숙명
소설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독자를 존재론의 심연으로 데려간다. 이야기의 종점은 철학적 질문의 출발점이 된다. “우연은 정말 우연인가?”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은 작품의 끝에서 가장 무거운 철학적 울림으로 확장된다.
닐은 핀치의 유품을 통해 그녀의 사상과 의도를 추적하며, 삶에서 만났던 수많은 ‘우연들’을 재해석하게 된다. 처음 그녀의 수업을 듣게 된 것도, 우연히 그녀와 점심을 함께하기 시작한 것도, 그녀가 죽은 후 미완성 에세이를 건네받은 것도, 모두 ‘우연’처럼 보였지만 실은 삶이 던져준 필연의 조각이었다.
반스는 이 지점에서 삶을 이해하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삶은 우리가 통제하고 계획하며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기 쉽지만,
실제로는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연속일지도 모른다는 통찰이다. 우리는 삶의 운전석에 앉아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우연이라는 바람에 실려가는 작은 조각배와도 같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닐이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것을 컨트롤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결국 삶의 본질과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이 충돌의 결과는 언제나 불완전함이다. 삶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때로는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선택일 수 있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해볼 수 없다.” 핀치가 생전 했던 이 말은 닐의 인생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문장은 일종의 삶의 진리이자, 수용의 문장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모든 것을 바꿀 수 없으며,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존재론적 자각이다. 그리고 이 자각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의 시작이다.
줄리언 반스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그런 지혜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조용히 열어준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필연이었고, 필연이었지만 그 안엔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삶. 그 복잡한 결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을 덜 두려워하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줄리언 반스 문체의 정점
줄리언 반스는 말의 미학을 아는 작가다. 그의 문장은 단순한 문장 구조를 넘어, 의미의 밀도와 언어의 리듬, 그리고 사유의 정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에서 그는 문체적 절정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반스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우아하고, 간결하지만 풍부하다. 이러한 모순적인 미덕은 문장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겉보기엔 단순해 보이는 문단 속에서도 깊은 사유의 바닥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는 감정의 과잉을 피하면서도,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파고든다. 그렇기에 그의 문장은 어떤 독자에게는 ‘차갑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실은 그 차가움 속에 뜨거운 철학과 인간성의 불꽃이 숨어 있다.
반스는 이번 작품에서 특히 ‘말하지 않음’의 미학을 극대화한다. 노골적인 설명 대신, 침묵과 여백 속에 의미를 남기며, 독자로 하여금 그 빈틈을 스스로 채우도록 유도한다. 이런 문체적 전략은 독자에게 더 큰 몰입과 사유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의 글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독서의 고통이 아닌, 사유의 기쁨으로 다가온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에서 우리는 그가 왜 “살아 있는 영국 문학의 전설”이라 불리는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문장의 품격과 통찰의 깊이, 언어의 정교함과 철학적 감성. 이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융합된 이 작품은, 줄리언 반스 문체의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의 모순을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삶이라는 모순 덩어리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철학적 거울이다. 줄리언 반스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인생의 역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삶은 언제나 명쾌하지 않다. 사랑과 상실, 신뢰와 오해, 우연과 필연. 이러한 감정들과 사건들은 단순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러한 ‘모순의 복합체’를 온전히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라고.
주인공 닐은 핀치와의 관계, 그녀의 죽음, 남겨진 유품, 율리아누스의 복잡한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길을 잃는다. 하지만 그 길 잃음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임을 깨닫게 된다. 삶의 모든 순간이 이유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감정이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인 뒤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삶의 아이러니를 감싸 안는 방식을 보여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떠나보내고, 기억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결국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깊이를 얻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삶의 모순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한 이들, 그리고 그 모순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이 된다.
철학적 독서를 즐기는 독자에게 최고의 선택
철학적 질문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은 정확히 그들을 위한 책이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단순히 재미있거나 감동적인 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읽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기억은 어디까지 사실일 수 있는가?”, “우연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넓게 바라보게 된다. 줄리언 반스는 독자에게 확실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 대신,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해석할 수 있는 여백을 남긴다. 이런 독서 경험은 흔치 않다. 마치 한 편의 철학 강의를 듣는 듯하면서도, 인간적인 감정을 온전히 공유하게 되는 문학의 경험. 줄리언 반스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데 성공한 보기 드문 작가다.
그렇기에 이 책은,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독자, 인생의 의미를 질문하는 독자, 논픽션과 철학서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독자들에게
완벽한 독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그 어떤 책보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준다. "생각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이 진짜 인간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