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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자크 『고리오 영감』 속 계급 현실, 지금과 닮았다

    왜 지금 『고리오 영감』인가?

    『고리오 영감』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치밀한 사회 묘사와 인간 심리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발자크는 이 소설을 통해 19세기 초 파리의 계급 구조와 인간 군상의 민낯을 냉정하게 펼쳐 보인다. 하지만 놀라운 건, 이 작품이 200년 전에 쓰인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고전을 시대의 유물로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낡은 언어와 배경, 오래된 사건 속에서 현대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찾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리오 영감』은 다르다.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질문을 던지고, 독자의 삶 깊은 곳을 건드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일상 속에서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고리오는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모든 것을 바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결국 외면과 배신으로 돌아온다. 이 장면을 접하면, 독자는 어쩐지 마음이 아프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어른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녀를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을 갈아 넣은 수많은 이들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헌신은 종종 ‘고마움’으로 돌아오기보단, ‘기대’와 ‘거리감’으로 변해 버린다. 부모의 자리는 당연해지고, 사랑은 점점 침묵 속에서 희미해진다. 고리오의 이야기는 그래서 슬프고, 더없이 현실적이다.

    라스티냐크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그는 젊고, 패기 있고, 무엇보다 성공하고 싶다. 그에게 출세는 곧 삶의 목적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꾹꾹 눌러 담는다. 그가 파리라는 거대한 욕망의 도시 속에서 점점 변해가는 과정은, 오늘날 사회 초년생이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사회’라는 이름의 무대 위에서 자신을 포장하고, 때로는 진심보다 전략을 택하며 살아간다. 라스티냐크의 선택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엮고 있는 주제는 바로 ‘계급’이다. 발자크는 계급이라는 구조가 인간의 행동과 관계, 심지어 감정까지 결정지을 수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 소설 속 파리는,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사람들과 그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계급은 사람 사이의 거리를 만든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같은 눈높이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파리의 진실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고리오 영감』은 지금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단지 문학사 속 한 페이지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의 초상을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 부모의 얼굴을, 우리의 친구를,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발자크는 인간이 왜 그렇게 욕망에 휘둘리는지, 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슬픔이 자주 피어나는지를 조용하지만 강하게 말한다.

    『고리오 영감』은 독자에게 말한다. “나는 그저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나는 너의 이야기, 너희 사회의 이야기, 그리고 인간의 이야기 전체를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이 책은 오래되었지만, 결코 낡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야말로, 이 책을 다시 꺼내어 곱씹어야 할 때다.

    고리오 영감 속 계급 구조, 그 냉정한 현실

    고리오 영감 속 계급 구조, 그 냉정한 현실

    『고리오 영감』의 중심 무대는 파리의 작은 하숙집, '보케르 하숙집'이다. 겉보기에 이곳은 계층 구분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이 하숙집 안에도 보이지 않는 선들이 존재한다. 말투 하나, 옷차림 하나, 심지어 식사하는 자세까지—모든 것이 그 사람이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지를 말해준다. 같은 공간을 나누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높이는 같지 않다. 계급은 그들의 관계를 지배하고, 일상 속 모든 디테일에 스며든다.

    고리오 영감은 그 하숙집에서 가장 아래층, 가장 외진 구석에서 산다. 그는 과거 국수를 제조해 부를 이뤘던 사람이다. 한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자식들에게 풍족한 삶을 물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부를 두 딸에게 넘기고, 남은 삶을 쓸쓸한 하숙방에서 보내게 된다. 그의 방은 곧 그의 사회적 위치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고, 아무도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과거의 부가 현재의 존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냉혹하다. 그렇게 그는 '지나간 사람'으로 취급되며 잊혀 간다.

    반면, 라스티냐크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인물이다. 시골 출신의 젊은 법학생인 그는 파리에 도착하면서부터 상류 사회로 올라가고자 하는 꿈을 품는다. 그 꿈은 막연하지 않다. 그는 누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투로 말하며,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어 가는지를 면밀히 관찰한다. 그리고 곧 깨닫는다. 진심이나 지식이 아니라, 외모와 말솜씨, 그리고 연줄이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출신 성분이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 소설에서 발자크는 '계급'이라는 단어를 단순한 경제적 구분 이상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태도이자 시선이고, 습관이며 말투다. 한 사람이 어떤 공간에 어울리는지를 결정짓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준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냉정할 만큼 명확하다. 아무리 똑똑하고 선한 사람이라도, 배경이 부족하면 고개를 들어 위를 볼 수 없다. 반대로, 상류층에 속한 사람은 뭔가 부족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계급은 곧 '허용된 실패'의 범위조차 다르게 만든다.

    더 무서운 건, 이 구조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소설 속 인물들 중 누구도 "왜 이 사회는 이렇게 불공평한가?"라고 외치지 않는다. 모두가,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긴다. 라스티냐크 역시 처음에는 약간의 분노를 느끼지만, 곧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고리오도 자신의 몰락을 사회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는 그저 딸들이 잘 살아주길 바랄 뿐이다. 이 무기력한 수용은, 계급이라는 구조가 얼마나 뿌리 깊고 강력한지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과연 2025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는 이들과 얼마나 다를까?
    고리오가 살아간 시대에서 200년이 흘렀고, 수많은 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졌다고들 말하지만, 여전히 우리 곁엔 ‘보이지 않는 사다리’가 있다. 누군가는 금수저로 태어나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실패를 피하고, 누군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환경에 갇혀 살아간다. 대학 입시, 취업, 인간관계, 심지어 연애마저도 배경이 영향을 미친다. 지금도 우리는 상대방의 말투와 직업, 사는 동네, 쓰는 브랜드를 통해 그 사람의 ‘계급’을 가늠하고 있다.

    『고리오 영감』은 바로 이런 현실을 정면에서 마주하게 만든다. 발자크는 그 시대의 파리를 통해, 계급이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때로는 그 사람의 가능성마저 지워버리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단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독자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정말, 계급의 영향에서 자유로운가?”라고. 그리고 이 질문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무게, 라스티냐크의 선택

    욕망이라는 이름의 무게, 라스티냐크의 선택

    라스티냐크는 『고리오 영감』 속에서 가장 변화의 곡선을 극적으로 그리는 인물이다. 시골 출신의 젊은 법학생으로 등장하는 그는, 처음엔 순수하다. 아직 사회의 본모습을 다 알지 못하고, 이상과 신념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곧 깨닫는다. 파리라는 도시, 그 안에서의 삶은 순수함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성공하기 위해선 눈치를 보고, 말을 다듬고, 사람들을 읽어야 한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욕망에 스스로를 맞춰야 할지도 모른다.

    라스티냐크는 말 그대로 ‘출세’를 꿈꾼다. 그리고 그 꿈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배경과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가고 싶어 하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것을 감내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가 어떤 것들을 잃어가느냐는 데 있다. 그는 사랑보다 명예를 택하고, 도덕보다 기회를 우선시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점점 ‘진심’보다는 ‘전략’이 스며든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마음보다 그 사람이 가진 ‘위치’를 먼저 본다. 그리고 그 과정이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한 청년의 타락이나 이기심으로만 볼 수 없다. 오히려 라스티냐크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사회에 던져졌을 때, 혹은 세상의 벽 앞에 섰을 때 겪게 되는 내면의 갈등을 상징한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싶은 희망. 그것 자체는 누구나 가진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문제는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나다움’을 포기하게 되는가이다.

    라스티냐크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꾸미기 시작한다. 말투를 바꾸고, 외모를 다듬고, 상류층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연출한다. 그런 그의 모습은 오늘날 SNS 속 인플루언서를 떠올리게도 한다. 보이는 이미지가 곧 가치가 되는 시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숨기며 살아가고 있을까? 라스티냐크의 선택은 지금 우리의 선택과 그리 다르지 않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소설의 마지막, 라스티냐크가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내뱉는 말이다. “이제는 나와 너 사이의 전쟁이다, 사회여!” 이 문장은 단순한 결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결별 선언이다. 더 이상 도덕이나 양심에 머물 수 없다는, 성공이라는 이름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결심이다. 그리고 그 말속엔, 그가 거쳐온 수많은 갈등과 상실이 담겨 있다.

    우리는 이 장면 앞에서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라스티냐크가 옳았는지, 그가 변절했는지 단정 짓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그에게 묻게 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라스티냐크는 이기적인가? 아니면, 시대의 희생자인가? 그런 질문은 곧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발자크는 라스티냐크를 통해 한 개인의 출세기만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인물의 삶 속에 우리가 사는 사회의 얼굴을 집어넣었다. 경쟁과 속도, 성과와 포장의 논리에 익숙해진 지금의 우리는 어쩌면 모두 라스티냐크처럼 살고 있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론 철저히 계산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따져보는 그런 삶.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우리는 라스티냐크처럼 변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가족이라는 이름의 희생, 사랑이라는 조건

    가족이라는 이름의 희생, 사랑이라는 조건

    『고리오 영감』에서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가족’이다. 가족이기에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졌던 희생과 기대, 그리고 그 끝에 남는 외로움. 발자크는 이 복잡하고 무거운 감정의 층을 집요할 정도로 파헤친다. 특히 고리오와 두 딸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가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에서 겪는 모든 갈등과 감정을 거울처럼 비춘다.

    고리오는 자식을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딸들에게 주었다. 단순히 경제적인 지원만이 아니다. 그는 삶의 의미, 존재의 이유 자체를 딸들에게 걸었다. 젊었을 때 힘겹게 일해 모은 돈을 아낌없이 내주었고, 자신은 초라한 하숙방에서 말년을 보내는 것을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딸들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사랑이 일방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사랑에는 기대가 없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딸들에게서 ‘사랑받고 싶다’는 절실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딸들은 아버지를 짐처럼 여긴다. 사회적 체면과 상류층의 시선 속에서, 고리오는 점점 불편한 존재가 된다. 젊고 화려한 삶 속에선 낡고 가난한 아버지의 자리는 없었다. 그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때조차, 딸들은 외면하거나 변명으로 일관한다. 한때는 모든 것을 주었던 사람에게 돌아오는 건 침묵과 거리감뿐이다. 그 모든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고리오는 병상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자리에 자식은 없다. 아버지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없다. 그는 조용히 사라진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이 장면은 단순한 소설 속 비극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현실 속 부모들이 고리오의 자리를 공유하고 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해 온 삶, 그것이 당연시되고 감사보다는 기대와 요구로 돌아오는 삶. 수십 년 동안 가족을 위해 바쳐온 세월이, 어느 날 ‘너무 부담스러워요’라는 한마디로 무너지기도 한다. 사랑은 분명 조건 없는 감정이지만, 계속해서 받기만 하는 쪽이 있는 관계는 결국 불균형을 만든다. 발자크는 그 사실을 아주 냉정하게, 그러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편, 딸들의 입장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다. 그들 역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이 있었고, 사회적 지위를 지켜야 할 현실이 있었다. 문제는 그 삶의 방향이 '가족보다 사회의 인정'으로 기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시, 오늘날의 세대 간 갈등과 닮아 있다. 자식 세대는 사랑보다 ‘성공’을, 헌신보다 ‘독립’을 중요하게 여긴다. 부모 세대는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외롭고 서운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가족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아졌고, 동시에 가족을 부담스러워하게 되었다. ‘부모니까 당연히’, ‘자식이니까 마땅히’라는 말이 너무 쉽게 오간다. 사랑이 전제되어 있기에, 상처도 더 깊게 남는다. 그래서 『고리오 영감』은 그저 가족 서사의 고전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어떻게 오해되고, 어떻게 멀어지며, 어떻게 끝내 외면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실 보고서다.

    고리오의 삶은 질문으로 남는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가? 우리도 모르게 사랑을 '조건'처럼 받아들이고 있진 않은가? 사랑은 줄수록 커지는 감정이지만, 때로는 말 한마디, 눈빛 하나가 그 감정을 지속시키는 힘이 되기도 한다. 고리오가 끝내 받지 못했던 그 눈빛, 그 따뜻한 손길 하나. 지금 우리가 주고 있는가, 혹은 받고 있는가.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을 통해 말한다. 가족이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고.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깊은 이해와 용서가 필요한 관계이기도 하다고.

    지금, 이 고전을 다시 꺼내야 하는 이유

    결론: 지금, 이 고전을 다시 꺼내야 하는 이유

    『고리오 영감』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욕망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오해를 만들어내며, 계급이라는 틀 속에서 어떻게 서로를 잃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200년 전 파리의 하숙집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오늘날 우리 주변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 시대의 라스티냐크는 지금의 우리 청년이고, 고리오는 지금의 부모이며, 그 딸들은 우리 모두가 지나온 혹은 지나가고 있는 가족의 어떤 모습일 수 있다.

    발자크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묻는다. 사회가 정한 성공의 기준은 과연 옳은 것인가? 사랑은 정말 무조건이어야만 하는가? 출신과 배경은 사람의 가치를 결정지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들 앞에서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것이 『고리오 영감』의 힘이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언어를 빌려 현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 삶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을 마주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간다. 빠르게 오르고, 강하게 경쟁하고, 더 많은 걸 가져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신조차 잊고 산다. 그런 우리에게 발자크는 조용히 말을 건넨다. “너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사랑을 어떻게 주고, 어떻게 받고 있는가?”, “지금 당신이 살아가는 이 구조는 당신의 것이 맞는가?”라고.

    이 질문들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이미 『고리오 영감』을 읽을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제, 잠시 멈추고 이 고전을 다시 꺼내보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질문, 그리고 당신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어쩌면 그 안에서, 지금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던 어떤 진심을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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