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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의 대표작 『그들(Them)』은 단순한 가족 드라마나 성장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빈곤과 계급, 인종 간의 긴장, 젠더 문제, 도시화로 인한 인간성의 파괴 등 다양한 사회적 요소를 정교하게 녹여낸 리얼리즘 소설이다. 특히 오츠는 디트로이트라는 실제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그 속에 살아가는 인물들의 내면과 갈등, 좌절과 희망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들』은 미국 내셔널 북어워드 수상작으로, 비평가들과 독자들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재평가되어 온 작품이며, 미국 도시 빈민층의 실체를 가장 날카롭게 조명한 현대 문학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글에서는 작품의 배경과 주요 인물인 로레타, 줄스, 마린의 성장과 붕괴를 따라가며, 그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과 감정의 변화를 분석하고, 조이스 캐롤 오츠가 문학을 통해 말하고자 한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각도로 조명해 본다.
로레타, 줄스, 마린 – 세 인물의 파열된 성장 서사
『그들』의 중심에는 로레타와 그녀의 두 자녀, 줄스와 마린이라는 세 인물이 존재한다. 이들의 삶은 단순한 개인 서사가 아니라, 미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맞물려 진행되는 하나의 상징적 이야기로 작동한다. 로레타는 어린 나이에 사랑에 대한 환상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어른이 되었지만, 현실은 그녀를 가차 없이 짓눌렀다. 아버지의 무책임과 가족 내 갈등 속에서, 그녀는 ‘살아남는 법’을 체득하며 점점 감정적으로 무뎌지고, 생존을 위해 감정을 억누르는 존재로 변화한다. 로레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을 마주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강인함을 보여준다.
줄스는 이 소설에서 가장 역동적인 캐릭터 중 하나로, 디트로이트의 거리와 폭력에 물들어가며 그만의 생존 방식과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는 때로는 냉소적이고, 때로는 이상주의적인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며 자신의 위치를 탐색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폭력과 분노, 자기 파괴로 점철된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는 도시가 만들어낸 ‘산물’이자, 계급의 덫에 갇힌 청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줄스의 내면에는 사랑과 존중을 갈망하는 욕망이 존재하지만, 그의 환경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의 사랑은 왜곡되고, 그의 분노는 사회를 향한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한편 마린은 줄스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의 연결을 거부한다. 그녀는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침묵과 은둔을 선택하고, 책과 공부를 통해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고요함은 곧 폭력적 침해에 의해 깨지고, 이는 그녀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마린은 여성으로서, 또 가족 내의 역할 속에서 이중적인 억압을 경험하고, 결국에는 극단적인 선택과 자기 단절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게 된다. 그녀는 침묵으로 저항하며, 그 어떤 감정보다 무감각을 택한다.
이 세 인물은 각기 다른 성격과 대응 방식을 보이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파열된 성장’을 겪는다. 이들의 서사는 전통적인 성장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이상적인 어른으로의 성숙이 아닌,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감정과 인간성을 파괴당하는 과정을 거친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들을 통해 한 사회의 하층민이 경험하는 폭력적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개인의 의지나 성격으로 극복할 수 없는 ‘사회 구조의 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로레타, 줄스, 마린의 이야기는 단지 한 가족의 비극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집단적인 증언이자 고발이다.
디트로이트, 붕괴하는 도시와 계급의 은유
『그들』의 배경이 되는 디트로이트는 미국 사회의 계급 구조와 도시 몰락을 상징하는 강력한 메타포로 작용한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 도시를 통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양극화와 그로 인한 폭력, 소외, 붕괴의 과정을 생생히 그려낸다. 디트로이트는 한때 번영했던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지만, 산업 구조가 변하고 경제가 쇠퇴하면서 급격히 붕괴된 도시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정체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는 『그들』의 인물들에게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도시의 붕괴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공간의 황폐함으로 나타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사회적 연결망의 붕괴, 가족 구조의 해체, 공동체 의식의 상실로 이어진다. 로레타의 가족은 이러한 붕괴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줄스와 마린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 환경에 적응하거나 저항하려 한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도 이 구조적인 몰락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디트로이트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은 이 도시가 품고 있던 분노와 긴장이 극한으로 치달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폭동은 인종 간의 갈등, 빈곤층의 좌절, 제도적 억압이 오랜 시간 누적된 끝에 터져 나온 폭력의 결과이며, 『그들』에서는 이 사건을 통해 도시가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순간을 포착한다. 줄스가 폭동 후 인터뷰에서 “Fire burns and does its duty(불은 타오르고 제 역할을 한다)”라고 말한 장면은 단순한 방화 행위가 아닌, 사회적 저항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오츠는 이 장면을 통해 도시의 파괴가 필연적이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기존 사회 질서의 모순을 드러낸다.
또한, 디트로이트는 계급 문제의 집약체로도 읽힌다. 부유한 백인들은 점차 교외로 빠져나가고, 도시 중심에는 빈곤한 흑인과 백인 하층민만이 남게 된다. 『그들』 속 인물들은 교육, 일자리, 의료, 법의 보호에서 모두 배제된 채 살아가며, 이는 단순한 운명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차별의 결과임을 작품은 끊임없이 암시한다. 도시의 몰락은 결국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의 몰락으로 직결되며, 인간 존엄성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은 폭력과 범죄, 절망의 악순환을 낳는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디트로이트를 통해 미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 도시가 허물어지는 장면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실패, 인종차별의 민낯, 계급 불평등의 고착화를 의미하며, 『그들』은 그러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처럼 디트로이트는 단지 배경이 아닌, 작중 모든 갈등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계급과 정체성, 인간성의 붕괴를 상징하는 거대한 은유다.
사랑, 젠더, 인종 – 복잡하게 얽힌 감정과 정체성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Them)』은 사랑, 젠더, 인종이라는 복합적인 주제를 통해 인간 정체성의 다층성과 모순을 조명한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결코 이상적이거나 낭만적인 감정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의 조건이자, 때로는 폭력과 권력의 도구로 기능한다. 로레타는 어린 시절,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며 미래를 꿈꾸지만, 곧 현실의 거친 파도 속에서 사랑은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녀의 사랑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전략에 가깝고, 이는 당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젠더적 억압의 단면을 보여준다.
마린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랑을 대한다. 그녀는 침묵과 거리 두기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며,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를 피하려고 노력한다. 마린에게 사랑은 위협이자 침입이며, 그녀의 고립은 여성으로서 경험한 트라우마의 결과다. 그녀는 공부와 내면의 세계로 도피하지만, 그것조차 외부 세계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녀의 성적 감정은 억제되고, 결국 그녀는 세상과의 단절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다.
줄스의 사랑은 더욱 복잡하다. 그는 욕망과 파괴 본능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진정한 연결을 갈망하면서도 이를 실현할 능력이나 환경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다. 그의 감정은 종종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되며, 이로 인해 그의 연애나 인간관계는 항상 불안정하고 파괴적으로 흘러간다. 줄스는 남성이지만 전통적인 남성성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으며, 동시에 섹슈얼리티에 있어서도 명확한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오츠가 젠더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그리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그들』 속 인종 문제는 줄스의 시선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백인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흑인이었을 경우 자신이 겪었을 사회적 차별과 불이익을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인종 우월감이 아닌, 구조적 인종차별 속에서 백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혜택'임을 인식하는 장면이다. 줄스는 흑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이것은 그가 내면적으로도 인종 갈등과 거리감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미국 도시 사회의 인종적 긴장과 계급 분리 현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반영한다.
결국 사랑, 젠더, 인종이라는 이 세 축은 각각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 얽혀 인물들의 감정과 선택, 그리고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 복잡한 관계망을 섬세하게 직조함으로써, 단순히 개인의 서사에 그치지 않고, 미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들』은 이러한 복합성을 통해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사회적 조건 속 개인의 고통과 분열을 가시화하며, 독자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으로 남는다.
결론: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Them)』은 미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계급적 고통을 인물의 삶 속에 세밀하게 투영한 문학적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작품 속 로레타, 줄스, 마린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애쓰지만, 모두가 현실의 벽 앞에서 상처 입고 파괴된다. 그들의 이야기는 개인의 나약함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잔혹함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오츠는 강하게 강조한다. 특히 디트로이트라는 도시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 자본주의의 부작용과 도시 붕괴, 인종 갈등, 계급 격차가 집중된 공간으로 기능하며, 이 도시 속 인물들의 비극은 곧 도시 자체의 운명을 상징한다.
또한 『그들』은 사랑, 젠더, 인종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조건이 충돌할 때 벌어지는 내면적 혼란과 갈등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이처럼 다양한 층위의 갈등과 통찰을 담고 있음에도 오츠의 문체는 서사적 흡입력이 강하며, 읽는 이를 현실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그녀의 서사는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진실하며, 독자에게 깊은 인상과 사고의 여지를 남긴다.
『그들』은 출간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들을 던진다. 빈곤과 계급, 인종차별, 젠더 불평등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이 소설은 그 문제들의 근본을 성찰할 수 있는 중요한 문학적 자산이다. 단순한 감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 각자가 자신의 삶과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이 작품은, 지금 이 시대에도 반드시 읽혀야 할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이 『그들』을 읽고 난 뒤 느끼는 불편함, 안타까움, 분노야말로 이 소설이 던지고자 한 진짜 메시지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