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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초에 한 명의 아이가 굶어 죽는 세상, 왜 아직도 기아는 사라지지 않았는가?

by 바그다드까페 2025.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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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초에 한 명의 아이가 굶어 죽는 세상, 왜 아직도 기아는 사라지지 않았는가?

기아는 왜 여전히 존재하는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 글을 읽는 단 몇 초 사이에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한 명의 아이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하루 10만 명. 해마다 3,65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름을 갖고 있었고, 가족이 있었으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소중한 생명체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고통 속에서 마감되었고, 세상은 이를 담담하게 넘긴다. 매스컴에 보도되지도 않고, SNS에 공유되지도 않는 그들의 죽음은 마치 예견된 운명처럼 여겨지곤 한다.

기아는 왜 여전히 존재하는가?

 

그러나 정말 그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세계가 매년 생산하는 식량은 120억 인구를 충분히 먹이고도 남는다. 현재 지구 인구가 약 80억 명 수준임을 고려할 때, 사실상 인류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수십억 명분의 식량이 남는 셈이다. 이처럼 식량은 풍족하다 못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수천만 명이 굶어 죽는다는 사실은 단순한 모순을 넘어서 끔찍한 불합리이자, 구조적 살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기아는 자연적인 재앙이 아니다. 그것은 기후 변화나 토지 부족, 재배 기술의 미비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적 선택과 경제적 탐욕, 그리고 윤리적 무관심이 빚어낸 비극이다. 식량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식량은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왜일까? 식량은 돈이 되는 상품이 되었고, 이윤을 창출하는 자산이 되었으며, 심지어 금융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식량이 필요한 사람의 손이 아닌, 더 많은 이윤을 챙기려는 자본의 손에 들어가는 구조 속에서 가난한 이들은 점점 더 배고파지고 있다.

기아의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뿌리 깊다. 이는 단지 가난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부자 나라가 만들어낸 세계 무역의 불균형에서 비롯되고, 자원을 독점하는 강대국의 이기심에서 기인한다. 농업 덤핑, 곡물 투기, 사막화와 삼림 파괴, 환경난민의 증가,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 온 불평등한 구조적 유산 등, 세계 기아 문제의 원인은 너무도 많고 또 얽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이 문제를 외면해 왔다. 익숙한 뉴스가 되었고, 마치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느끼며 거리 두기를 해왔다. 그러나 장 지글러는 분명하게 말한다. 굶주림으로 죽는 아이는 자연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방치하고 세계가 모른 척한 결과로 인해 살해당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고통스럽게 하루를 버티고 있다. 배고픔은 단순히 허기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기력과 질병, 교육의 단절, 인권의 유린,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의 붕괴로 이어진다. 먹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밥 한 끼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를 파괴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현실은 바로 그것이다.

왜 세계는 아직도 기아를 극복하지 못했는가? 아니, 왜 세계는 기아를 방치하고 있는가?
기아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불가피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해결할 의지보다 더 강한 무관심과 구조적 이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수많은 아이들이 단지 ‘가난하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매일같이 죽어갈 것이다.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단지 누군가가 조금만 나누었더라면. 단지 이 세상이 좀 더 공정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이 불편한 진실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면.

구조적 폭력과 세계 기아 문제

기아는 우연히 발생하는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라는 이름의 명확한 원인을 갖고 있다. 물리적인 무기나 전쟁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천천히 죽음으로 내모는 이 폭력은 사회, 정치, 경제 시스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세계 기아 문제를 더욱 고착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아’는 단순히 식량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장 지글러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식량은 넘친다. 문제는 그것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다국적 기업의 창고에는 판매되지 못한 식품들이 쌓여가고, 선진국의 마트 진열대에서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이 매일같이 버려지고 있다. 심지어 유럽과 북미에서는 식량 폐기물이 국가 전체 소비량의 30%에 달할 정도다.

구조적 폭력과 세계 기아 문제

 

반면, 지구 반대편의 빈곤국에서는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부모는, 이윤을 좇는 국제 농업 기업과 식량 투기꾼들에 의해 생계를 빼앗긴 경우가 많다. 남반구의 많은 국가들은 이미 다국적 기업에 농지를 빼앗겼고, 그곳에서 자라난 작물들은 해외 수출용이다. 정작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농사도, 소비도 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이처럼 식량이 투기와 자본의 논리에 따라 거래되고 배분되는 현실은 명백한 폭력이다. 곡물이 주식시장에 상장되고, 식량 가격이 투기꾼의 입김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은 그저 '소외된 소비자'일 뿐이다. 먹을 자격도, 선택권도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국제 식량 시장에서 이뤄지는 이러한 불공정 거래는 가난한 국가들의 식량 주권을 빼앗고, 종속된 구조를 심화시킨다.

또한 농업 덤핑도 큰 문제다. 유럽연합이나 미국은 자국 농민들을 보호하고 가격을 낮추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한 뒤, 그 초과 생산물을 개발도상국 시장에 헐값에 팔아넘긴다. 이는 현지 농업 기반을 붕괴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자립 가능성마저 뺏어간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수백만 명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범죄에 가깝다.

도시화와 환경 파괴도 기아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사막화, 삼림 파괴, 수질 오염은 농사를 짓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고, 이는 생계형 농민들의 삶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는다. 그렇게 생계를 잃은 사람들은 도시 빈민으로 밀려나고, 결국 또 다른 차원의 기아와 빈곤 속으로 떨어진다.

이 모든 과정은 ‘누군가의 이득’으로 이어진다. 기아는 아무도 이득을 보지 못하는 참사가 아니다. 오히려 기아는 특정 집단이 부를 축적하고, 시장을 지배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이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힘없는 이들의 굶주림은 뉴스 한 줄로 소비되고, 곡물 시장의 가격 변동은 금융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아이가 굶어 죽는 장면보다, 식량 선물 가격의 상승이 더 중요한 세계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장 지글러는 이러한 현실을 ‘살인적 세계질서’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말한다. “기아는 불가피하지 않다. 그것은 살인이다.” 기아는 우연히 찾아온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외면과 침묵 속에서 키워진, 인간이 만든 폭력이다. 우리가 이 구조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사이에도, 누군가는 이 시스템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생명을 잃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기아를 자연재해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제이며,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단지 그것을 위해 필요한 건, 더 많은 식량이 아니라, 더 많은 정의연대, 그리고 행동이다.

장 지글러의 시선과 행동

기아는 수치다. 그리고 그 수치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한 인물이 바로 장 지글러다. 그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실천적 지식인으로, 책상 앞이 아닌 세계 기아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며 기록하고 싸워온 인물이다. 유엔 인권위원회 산하 ‘식량특별조사관(Special Rapporteur on the Right to Food)’으로 활동했던 그는, 단순한 이론가가 아닌 행동하는 지성의 상징이 되었다.

장 지글러는 "이 세상에는 기아로 죽어야 할 운명은 없다. 기아로 죽는 아이는 살해당한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문장은 그의 모든 철학을 압축한 선언이자, 전 세계를 향한 강력한 고발이다. 그는 기아를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인위적인 비극'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막을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외면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멈출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세상에는 기아로 죽어야 할 운명은 없다. 기아로 죽는 아이는 살해당한 것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그런 그의 신념과 행동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딱딱한 보고서나 이론서가 아니라, 실제로 세계를 향한 질문을 품은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쓰였다. 이는 장 지글러가 이 문제를 ‘학문’이 아닌 ‘삶의 윤리’로 접근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책 속에서 그는 단지 기아 문제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다국적 기업의 농지 독점, 국제 금융 자본의 식량 투기, 유럽연합의 농업 덤핑, 농업연료 생산을 위한 곡물 소각 등 구조적 원인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특히 금융 시장에서 곡물이 ‘수익성 있는 투자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현실은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사람이 먹지 못하는 이유가 곡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 경제 질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장 지글러는 '기아의 피해자'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그는 이 구조 속에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을 철저하게 드러낸다. 거대한 식품 기업, 투기 자본가,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선진국 정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무관심한 대중. 그는 말한다. “우리들의 침묵이 그들을 죽인다.”

그렇기에 그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기아의 참상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들이 행동하도록 촉구한다. 분노하라고, 연대하라고, 정치적 행동을 하라고 강하게 요청한다. 단순한 기부나 동정이 아닌, 구조를 바꾸는 사회적 참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메시지는 무겁지만 희망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선함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기아로 죽어가는 누군가의 생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바로 ‘우리’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장 지글러의 시선과 행동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거대한 침묵에 대한 항의이며, 정의를 향한 외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들을 위한 따뜻한 연대의 손길이다.

지글러는 말한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단호한 문장은 독자의 가슴을 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선택받지 못한 아이는 식탁 앞이 아닌, 쓰레기 더미 앞에 서 있다.
그 아이의 생명은 우리가 만든 질서 속에서 지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지만, 어떤 책은 단순한 정보나 지식 그 이상을 건넨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고통을 직면하게 만들고, 침묵 대신 행동을 고민하게 하며, 세상의 구조적 불의에 눈을 뜨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읽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자체로 하나의 '행동'이며 '변화의 씨앗'이다.

한국 사회는 비교적 기아의 직접적인 참상을 겪지 않는 나라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세계의 굶주림을 뉴스 속 ‘먼 나라 이야기’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장 지글러의 이 책은 그 인식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그는 이야기한다. "기아는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단면’이며, 우리가 선택하고 있는 구조의 ‘그림자’다."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커피 한 잔, 밥상에 오르는 곡물,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지는 음식들. 이 모든 것은 세계 어딘가의 굶주림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구체적이고도 치밀하게 보여준다.

한국의 수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동정이나 연민의 눈물이 아니다. '내가 너무 무지했고, 너무 무관심했구나'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눈물이다. 그 깨달음은 개인의 삶을 바꾼다. 소비하는 방식, 뉴스를 보는 시선, 그리고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만든다.

특히 이 책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꼭 필요한 교양서이자 세계시민교육의 기초서라 할 수 있다.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불편한 진실’을 이 책은 알려준다. 기아는 단지 가난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과 탐욕, 그리고 국제 정치의 냉혹한 계산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청소년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다.

우리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렇기에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많은 교육 단체, 시민단체, 도서관 등에서 추천 도서로 선정되었으며, 유시민 작가, 한비야, 이동진 평론가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 또한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해 왔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인도주의란 무엇인가, 연대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할 수 있도록 만든다. 단순히 기아의 통계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세계를 만들고 싶고, 그 속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것은 매우 강력한 경험이며, 독자로 하여금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기아 문제는 '누군가가 해결해 주겠지' 하고 미뤄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말한다. "세상은 저절로 변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는 건 깨어 있는 시민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침묵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더 이상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없도록 우리의 무기력함과 무관심에 맞서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은 어쩌면 당신의 삶을 바꿔 놓을지도 모른다. 더 깊은 공감, 더 분명한 연대, 그리고 더 단단한 책임감으로. 그리고 그 변화는, 당신만이 아니라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그 소중한 예외 중 하나다.

마무리: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

지구상에는 120억 인구를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매일 10만 명이 굶어 죽는다. 그중 다수는 어린아이들이다. 이 잔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변명을 늘어놓을 수 없다. 기아는 결코 불가피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만들어낸 체계적 폭력이며, 반복되는 방치의 결과다.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끊임없이 되묻는다.
"당신은 왜 침묵하는가?"
"당신은 왜 행동하지 않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지는 말,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임의 선언이다.

세계 기아 문제는 막연한 구호로 해결되지 않는다. 일시적인 기부나 감성적인 SNS 공유로 끝나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의 뿌리에 있는 구조를 보고, 그 구조를 바꾸기 위한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시민의 역할이며,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이다.

우리는 모두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더 이상 모른 척하고 돌아설 것인가, 아니면 이 문제를 ‘나의 일’로 받아들일 것인가? 매일 배불리 먹는 자신의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부조리한 특권을 인식하고, 그것이 어떻게 세계의 다른 누군가에게 고통으로 전가되고 있는지를 직면할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그리고 용기 있는 시민은, 세상을 바꾼다.
한 명의 용기가 열 명의 연대를 만들고,
열 명의 연대가 백 명의 행동으로 확장될 수 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 행동은 식량 덤핑을 멈추게 만들고,
곡물 투기의 장을 흔들며,
다국적 기업의 착취적 행태에 경고를 보낼 수 있다.

기아는, 우리가 끝낼 수 있는 문제다.
단, 우리가 ‘진심으로 원할 때’에만.

책장을 덮는 이 순간에도, 어딘가의 한 아이는 오늘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 아이의 생명은 단지 ‘출생의 우연’으로 인해 위태롭고, 그 우연은 우리 모두가 가진 행운이기도 하다.

그 행운을, 단지 개인의 안락함으로만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책임으로 승화시킬 것인가?

이 책은 말한다.
인간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라고.
그리고 바로 그 공감에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고.

지금, 그 공감의 첫걸음을 내디딜 차례다.
행동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읽고, 알리고, 말하고, 함께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침묵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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